세르게이 파라자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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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1924년 조지아(당시 조지아 SSR)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계 영화감독이다. 그는 다양한 예술 교육을 받았으며, 모스크바와 키예프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파라자노프는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시적 영화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 《석류의 색》, 《수람 요새의 전설》 등이 있으며,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을 탐구했다. 파라자노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소련 당국과의 갈등으로 억압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90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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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파라자노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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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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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르키스 호프세피 파라자냔 (아르메니아어: Սարգիս Հովսեփի Փարաջանյան) |
출생일 | 1924년 1월 9일 |
사망일 | 1990년 7월 20일 |
출생지 | 트빌리시,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사망지 | 예레반,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민족 | 아르메니아인 |
묘지 | 코미타스 판테온, 예레반, 아르메니아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화가 공예가 |
활동 기간 | 1951년–1990년 |
배우자 | Nigyar Kerimova (1950년–1951년) Svetlana Shcherbatiuk (1956년–1962년) |
자녀 | 1명 |
로마자 표기 | |
아르메니아어 | Sargis Hovsepi Parajanyan |
러시아어 | Sergei Iosifovich Parajanov |
우크라이나어 | Serhiy Yosypovych Parajanov |
조지아어 | Sergo Parajanovi |
경력 | |
주요 작품 | 불의 말들 석류의 색깔(1969년) |
수상 | 시체스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스람 요새의 전설, 1986년) |
기타 이름 | Sergei Parajanov Paradzhanov Paradjanov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 | Parajanov.com |
2. 생애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파라자노프는 1924년 1월 9일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예술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며, 음악원을 거쳐 모스크바의 게라시모프 전러시아 영화 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10]
1950년대부터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영화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초기 작품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1965년 발표한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는 독창적인 영상미로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아르메니아에서 제작한 《석류의 색》(1969년)은 난해하다는 비판과 함께 검열을 거쳐 상영되는 등 예술적 표현에 대한 제약이 심화되었다.
파라자노프는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정치적 견해 때문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73년에는 동성애 등 부당한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의 수용소형을 선고받았으며,[21][22] 국제적인 영화인들의 석방 운동 끝에 4년 만인 1977년 풀려났다.[21] 1982년에도 잠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수감 기간 동안에도 그는 콜라주, 드로잉 등 왕성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23]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이르러서야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조지아에서 《수람 요새의 전설》(1985년)과 아제르바이잔에서 《아쉬크 케리브》(1988년)를 발표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그는 "모두가 내가 세 개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우크라이나에서 일했으며, 아르메니아에서 죽을 것이다."[20]라고 말하며 자신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말년에는 자전적 영화 《고백》을 준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90년 7월 20일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폐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한 투쟁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의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파라자노프(본명: 사르키스 호브세피 파라자냔, Սարգիս Հովսեփի Փարաջանյանhy)는 1924년 1월 9일,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도 티플리스(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이오시프 파라자노프와 시라누시 베자노바는 예술적 성향을 지닌 아르메니아인이었다. 파라자노프라는 성은 그의 조부가 제2 길드 상인 자격을 얻으며 개명한 러시아식 이름이다. 아버지 이오시프는 원래 제정 러시아 군의 소년 장교였으나, 혁명 후에는 보석과 귀중품을 거래하는 골동품 가게를 운영했다.[9][10] 하지만 소련 당국의 금융 투기 금지 정책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은 순탄치 않았고, 당국은 종종 가게를 급습하여 귀중품을 압수했다. 어린 파라자노프는 때때로 작은 보석 조각을 삼켜 숨겼다가 당국의 수색이 끝나면 배설해야 하는 일도 겪었다고 전해진다.[9][10] 그는 누나 두 명 아래 삼 형제 중 막내였으며, 어린 시절 바이올린, 노래, 발레, 그림 등 다양한 예술 교육을 받으며 풍족한 예술적 환경에서 성장했다.파라자노프는 지역 철도 전문학교에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트빌리시 국립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1945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겨 소프라노 니나 돌리악에게 성악을 배웠다.[10] 그러나 그는 음악가의 길 대신 영화감독의 길을 선택하여 음악원을 중퇴하고, 1946년 모스크바의 게라시모프 전러시아 영화 학교(VGIK) 연출학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우크라이나 영화의 거장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와 이고르 사브첸코, 그리고 미하일 롬과 같은 저명한 감독들로부터 영화 연출 지도를 받았다.
2. 2. 초기 영화 경력과 결혼
1946년, 모스크바의 전소(全蘇) 국립 영화 대학교 감독과에 입학하여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이고리 사브첸코, 미하일 롬 등에게 영화 제작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47년 여름,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처음 투옥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8년 초 석방되었다.1950년 볼가 타타르인 여학생과 결혼했지만, 이듬해인 1951년 그녀는 가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같은 해 첫 단편 영화인 『''Молдавская сказка|몰다프스카야 스카스카ru''』(몰도바 이야기)를 제작했다.
1953년부터 키예프에 정착했으며, 1954년에는 야코프 바젤랸과 공동으로 첫 장편 영화 『안드리에시』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몰도바 시인 엠리안 부코프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1955년에는 우크라이나인 스베틀라나 체르바츄크와 재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1961년 이혼했다. 1957년에는 텔레비전 방영용 단편 영화 『황금의 손』, 『나탈리야 우지비』, 『둠카』 세 편을 제작했다.
1961년에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장편 『우크라이나 랩소디』를, 1962년에는 종교적 문제에 휘말린 돈바스 광부들을 그린 장편 『돌 위의 꽃』을 발표했다. 이 시기 파라자노프의 작품들은 당시 소련 당국이 요구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향을 따랐으며, 이후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파라자노프는 1962년 개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내 고향은 전쟁터였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3.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와 국제적 명성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첫 영화인 《이반의 어린 시절》은 파라자노프가 영화 제작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1962년에 공개된 타르코프스키의 이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 역시 파라자노프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파라자노프는 그를 "마치 신과 같다"고 묘사하며 "장엄한 스타일"의 감독이라고 평했다.[17]이러한 예술적 자극 속에서 파라자노프는 1960년대 초반까지 따르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1964년, 우크라이나 작가 미하일 코추빈스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는 그에게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의 영화화를 의뢰했다. 파라자노프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완전한 창작 통제 하에 첫 영화를 만들게 된다. 촬영은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 자비 마을에서 후출인의 협력을 받아 진행되었고, 촬영 감독으로는 유리 일리엔코가 참여했다.
1965년에 완성된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는 시적인 영상미와 독창적인 스타일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으며 마르델플라타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를 포함한 여러 상을 수상했다. 소련 당국 역시 초기에는 "미하일 코추빈스키의 이야기를 영화 언어를 통해 시적인 품질과 철학적 깊이로 전달했다"고 칭찬하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빛나는 창작 성공"이라고 평가했다.[18] 특히 이 영화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소련 내 다른 지역 배급 시 러시아어 더빙을 강제하는 당시 관행과 달리 원본의 우크라이나어 사운드트랙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이례적으로 허용했다.[18]
그러나 모스크바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았고 전국적인 배급에는 실패했다. 키예프 개봉 당시 파라자노프는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에 대한 부당한 체포와 구금에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영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66년 프랑스에서는 《불의 말》(Feuerpferde)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는데, 상영 시간은 원본 100분에서 95분으로 단축되었다.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의 성공 이후 파라자노프는 1965년부터 1966년에 걸쳐 키예프 영화 스튜디오의 의뢰로 《키예프의 프레스코화》 제작을 시작했으나, 초현실주의적인 스타일 때문에 제작이 중단되었다. 결국 이 작품은 15분짜리 단편으로 편집되어 1966년에 발표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파라자노프는 문예학자 빅토르 시클로프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1968년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이주하여 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 사야트 노바에 관한 영화 《사야트 노바》 제작 준비에 착수했다.[19] 이 영화는 비교적 열악한 환경과 적은 예산으로 촬영되었다.[20] 하지만 1969년 완성된 영화는 난해하고 퇴폐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선동적인 내용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고스키노)의 혹평을 받고 상영이 금지되었다. 결국 영화는 세르게이 유트케비치에 의해 재편집되고 일부 장면이 삭제된 후, 1971년에 《석류의 색》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상영되었다.
2. 4. 《석류의 색》과 억압

1969년 완성된 영화 《석류의 색》(원제: 사야트 노바)은 모스크바, 키이우, 예레반, 트빌리시에서 개봉되었으나, 난해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고스키노)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영화는 세르게이 유트케비치에 의해 재편집되어 1971년 《석류의 색》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상영되었지만, 여러 장면이 삭제되어 원본의 일부는 현재까지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파라자노프가 기획한 10편의 영화는 모두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파라자노프는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공감과 1965-1966년 우크라이나 숙청에 대한 항의 등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KGB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69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위원회는 파라자노프가 젊은 동료들에게 이념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이며, 해외여행 시 망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중앙위원회에 보고하기도 했다.[9]
1973년 12월, 파라자노프는 키이우에서 동성애, 소도미, 포르노물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5년의 중노동 수용소형을 선고받았다.[21][22] 이는 그가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발렌틴 모로츠 재판에서의 증언을 거부하고, 민스크에서 소련 당국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체포 3일 전, 그의 친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파라자노프의 예술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의 석방을 호소했다. "지난 10년 동안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단 두 편의 영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와 '석류의 색'을 만들었습니다. ... 예술적으로 파라자노프를 대체할 사람은 전 세계에 거의 없습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그의 고독에 대한 죄."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 영화 제작자, 활동가들이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는 로버트 드 니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지, 이브 생 로랑,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루이스 부뉘엘,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이 포함되었다.

파라자노프는 5년 형기 중 4년을 복역했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미니어처 인형 조각상과 약 800점의 그림 및 콜라주를 제작했으며, 이 작품들 중 다수는 현재 예레반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3] 그의 창작 활동은 간수들의 방해를 받았으나, 모스크바에서 "그 감독은 매우 재능이 있다"는 발표가 나온 후에야 괴롭힘이 줄어들었다고 전해진다.[20]
그의 조기 석방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과 그의 아내 엘사 트리올레, 그리고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 등의 노력 덕분이었다.[20] 1977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아라공 부부를 만났을 때, 아라공이 파라자노프의 석방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석방이 결정되었다.[21]
감옥에서 풀려나 트빌리시로 돌아온 후에도 소련 당국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파라자노프는 영화 제작을 재개하기 어려웠다. 대신 그는 수감 시절 연마했던 콜라주, 추상화, 인형 제작 등 다른 예술 활동에 몰두했다.
1982년 2월, 파라자노프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추모 연극 초연 참석차 모스크바에 갔다가 뇌물 수수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로 같은 해 11월에 석방되었다.[21] 이러한 두 차례의 투옥과 강제 노동은 파라자노프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2. 5. 수감 생활과 예술 활동
1960년대 초부터 파라자노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친화력과 관련된 다양한 정치 활동으로 인해 KGB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65-1966년 우크라이나 숙청 이후에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1969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위원회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국은 파라자노프가 젊은 동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념적으로 해로운 의견을 유포하는 주요 인물이며, 해외 여행 시 망명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다.[9]
결국 1973년 12월, 그는 키이우에서 체포되어 동성애, 소도미, 포르노물 유포 혐의로 기소되었고, 5년의 중노동 수용소형을 선고받았다.[21][22] 파라자노프의 선고 3일 전, 그의 친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파라자노프의 예술적 가치를 역설하며 그의 석방을 호소했다. 타르코프스키는 편지에서 "지난 10년 동안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단 두 편의 영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와 '석류의 색'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들은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영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술적으로 파라자노프를 대체할 사람은 전 세계에 거의 없습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그의 고독에 대한 죄. 우리는 매일 그를 생각하지 못하고 거장의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로버트 드 니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지, 레오니드 가이다이, 엘다르 랴자노프, 이브 생 로랑,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프랑수아즈 사강,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루이스 부뉘엘,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미하일 바르타노프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예술가, 배우, 영화 제작자, 활동가들이 파라자노프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파라자노프는 선고된 5년 형 중 4년을 복역했다. 그는 자신의 조기 석방이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 아라공, 아라공의 아내 엘사 트리올레, 그리고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의 노력 덕분이라고 후에 언급했다.[20] 그의 석방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아라공과 트리올레를 만났을 때, 브레즈네프가 도울 일이 있는지 묻자 아라공이 파라자노프의 석방을 요청한 결과로 이루어졌으며, 1977년 12월에 최종 결정되었다.[21]
수감 기간 동안 파라자노프는 수많은 미니어처 인형 조각상(일부는 분실됨)과 약 800점의 그림 및 콜라주를 제작했다. 이 작품들 중 다수는 현재 예레반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23] 수용소에서의 그의 예술 활동은 간수들에 의해 방해받기 일쑤였으며, 간수들은 그의 재료를 빼앗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이러한 탄압은 모스크바에서 "그 감독은 매우 재능이 있다"는 발표가 나온 후에야 다소 잠잠해졌다고 전해진다.[20] 감옥에서 트빌리시로 돌아온 후에도 소련 당국의 면밀한 감시는 파라자노프가 영화 제작을 재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감옥에서 연마했던 다른 예술 분야, 즉 복잡한 콜라주 제작, 추상화 그리기, 더 많은 인형과 독특한 의상 제작 등에 몰두하게 되었다.
1982년 2월, 파라자노프는 타간카 극장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추모 연극 초연 참석차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뇌물 수수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1년도 채 안 되어 석방되었다.[21] 이후 1983년, 트빌리시에서 개혁적인 문화 정책을 펼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에 의해 다시 영화 촬영 허가를 받게 되었고, 1984년 조지아 민화를 각색한 『술람 요새의 전설』을 제작하며 16년 만에 영화 감독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2. 6. 복귀와 말년
1983년, 트빌리시에서 개혁적인 문화 정책을 펼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에 의해 파라자노프에게 다시 영화 촬영 허가가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16년 만의 영화감독 복귀를 준비하여, 1984년 조지아 민화를 각색한 ''수람 요새의 전설'' 제작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1985년, 소련 내 완만한 해빙 분위기와 여러 조지아 지식인들의 격려 속에 파라자노프는 도도 아바시제와 함께 다니엘 콘카드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완성했다. ''수람 요새의 전설''은 15년 만의 장편 복귀작으로 모스크바 개봉 당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유럽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1985년에는 파라자노프의 콜라주와 데생 등을 모은 전시회가 트빌리시에서 열리기도 했다.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파라자노프는 이전보다 자유로운 활동 환경을 맞았다. 64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해외 출국 허가를 받는 등 변화가 있었다. 1987년, 그는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아쉬크 케리브''의 영화화에 착수하여, 같은 해 10월 아제르바이잔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1988년에 완성된 이 영화는 아제르바이잔 문화를 배경으로 방랑하는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와 뉴욕 영화제 등에 초청되어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파라자노프는 이 영화를 그의 절친한 친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전 세계의 모든 아이들"에게 헌정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카이에 뒤 시네마 등의 주도로 파라자노프의 전 작품 상영회가 열렸고, 1988년 예레반에서는 그의 콜라주와 인형 등을 모은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1989년, 자전적 작품인 ''고백''을 준비하던 중 폐와 심장 질환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후 왼쪽 폐에서 암이 발견되어 모스크바에서 폐엽 절제 수술을 받았다. 1990년에는 유럽 영화제 방문을 앞두고 폐렴을 앓아 방문지인 보르도에서 입원하기도 했다. 이후 트빌리시로 돌아왔으나 호흡기 합병증이 생겨 예레반에서 치료를 받았고, 파리에서 화학 요법을 받았으나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결국 예레반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던 파라자노프는 1990년 7월 20일,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폐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파라자노프의 죽음에 페데리코 펠리니, 토니노 구에라, 프란체스코 로시, 알베르토 모라비아, 줄리에타 마시나,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등 많은 유럽 영화인들이 공개적으로 애도를 표했다.[24] 그들은 러시아에 보낸 전신에서 "영화계는 한 마법사를 잃었습니다. 파라자노프의 환상은 영원히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라고 추모했다.[24] 그의 마지막 작품인 ''고백''은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원본 네거티브 필름은 그의 절친한 친구 미하일 바르타노프가 1992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라자노프: 마지막 봄》을 통해 일부 공개되었다.
3. 작품 세계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독특하고 시적인 영화 언어를 통해 소련 내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탐구한 감독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 우크라이나 관련 작품에서 시작하여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 코카서스 지역의 문화와 역사로 확장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 석류의 색(원제: 사야트 노바), 수람 요새의 전설, 아쉬크 케리브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각 민족의 신화, 전설, 민속 등을 독창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하며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을 이룬다.
파라자노프는 기존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을 활용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이는 당시 소련의 문화 정책과 충돌하여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후대의 많은 영화감독과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문화적 정수와 역사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3. 1. 시적 영화 언어와 비주얼 스타일
파라자노프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레이디 가가의 2020년 뮤직 비디오 "911"은 여러 장면에서 ''석류의 색깔''의 시각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참조했다.[32] 영상 마지막 장면에는 영화 포스터가 등장하기도 하며,[33] 영화의 상징들을 레이디 가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알레고리로 재해석하여 사용했다.[33]
- 마돈나의 1995년 뮤직 비디오 "자장가" 역시 ''석류의 색깔''의 장면 일부를 재현했다. 어린 아이가 바닥의 오각별 위에 태아 자세로 누워 있고 어른이 이불로 덮는 장면, 맨발이 석판 위의 포도송이를 밟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34] 이 외에도 꿈과 초현실주의 예술 작품 등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 니콜라스 자르는 2015년에 ''석류의 색깔''을 위한 대체 사운드트랙 앨범 ''석류''를 발매했다.[35]
- 얼터너티브 록 그룹 R.E.M.의 "Losing My Religion" 뮤직 비디오 또한 ''석류의 색깔''의 영향을 받았다.[36]
- 미국 작가 제임스 채프먼의 2006년 소설 ''스텟''은 파라자노프의 삶을 다소 느슨하게 기반으로 하고 있다.[31]
3. 2.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의 탐구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그의 영화 경력 동안 소련을 구성했던 다양한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 그리고 전통을 탐구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초기 우크라이나 관련 작품부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 코카서스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활동은 이러한 주제 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연도 | 작품명 | 비고 |
---|---|---|
1951년 | 몰다비안 동화 (Молдавская сказкаrus) | 단편 |
1954년 | 안드리예시 (Андриешrus) | 야코프 바젤리안과 공동 연출 |
1957년 | 황금 손 (Золотые рукиrus) | 단편 다큐멘터리 |
1957년 | 나탈리아 우즈비 (Наталия Ужвийrus) | 단편 |
1957년 | 둠카 (Думкаrus) | 단편 다큐멘터리 |
1958년 | 마을 최고의 청년 (Первый пареньrus) | |
1961년 | 우크라이나 랩소디 (Украинская рапсодияrus) | |
1962년 | 돌 위의 꽃 (Цветок на камнеrus) | |
1964년 |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 (Тіні забутих предківukr) | |
1966년 | 키예프의 프레스코화 (Киевские фрескиrus) | 단편 |
1967년 | 하코프 호브나타냔 (Հակոբ Հովնաթանյանhye) | 단편 다큐멘터리 |
1968년 | 어린이 콤미타스에게 (Երեխաներ Կոմիտասինhye) | 단편 다큐멘터리 |
1968년 | 사야트 노바 (Նռան գույնըhye) | 1971년 세르게이 유트케비치가 석류의 색으로 재편집 |
1984년 | 수람 요새의 전설 (ამბავი სურამის ციხისაkat) | |
1985년 | 피로스마니의 아라베스크 (Арабески на тему Пиросманиrus) | 단편 다큐멘터리 |
1988년 | 아쉬크 케리브 (აშიკი ქერიბიkat) | |
1989년-1990년 | 고백 (Խոստովանանքhye) | 미완성 |
특히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 사야트 노바(석류의 색), 수람 요새의 전설, 아쉬크 케리브 등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민족의 신화, 전설, 역사적 인물, 민속 등을 독창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하며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작업은 당시 소련의 문화 정책 하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3.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결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첫 영화인 《이반의 어린 시절》은 파라자노프가 영화 제작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탈리아 영화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역시 파라자노프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파라자노프는 훗날 파솔리니를 "마치 신과 같다"고 묘사하며 "장엄한 스타일"의 감독이라고 평가했다.[17]1965년, 파라자노프는 기존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완전한 창작 통제 하에 첫 영화인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를 연출했다. 이 시적인 영화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으며, 소련 당국으로부터도 초기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국은 이 영화가 "미하일 코추빈스키의 원작 소설을 영화 언어를 통해 시적인 특성과 철학적 깊이로 잘 표현했다"고 칭찬하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빛나는 창작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례적으로 소련 내 다른 지역에 배포될 때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러시아어 더빙 대신, 원본의 우크라이나어 사운드트랙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18] 이는 당시 러시아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 제작된 소련 영화가 해당 공화국 외부로 배급될 때 러시아어로 더빙하는 것이 표준 절차였던 점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국의 호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1969년 파라자노프는 다음 영화 작업을 위해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아르메니아에서의 경험은 그가 《사야트 노바》를 연출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19] 이 영화는 비교적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매우 적은 예산으로 촬영되었다.[20]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와 달리 《사야트 노바》는 소련 당국의 비판에 직면했다. 당국은 영화의 내용이 선동적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입하여 상영을 금지했다. 결국 파라자노프는 당국의 압력 하에 영화를 재편집해야 했고, 제목도 《석류의 색》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결별 이후 파라자노프가 겪게 될 예술적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4. 주요 작품 목록
Moлдавська байкаuk
Moldavska baika
(별칭: 최고의 남자)
Перший пapyбокuk
Pershyi parubok
Укpaїнськa рaпсодіяuk
Ukrainska rapsodiya
Квітка на каменіuk
Kvitka na kameni
Киевские фрескиru
Kievskie freski
Арабески на тему Пиросманиru
Arabeski na temu Pirosmani
Aşıq Qəribaz
Aşıq Qərib